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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 드라마를 보면서 조선제일침 허임에 관해 찾아봤다.

그동안 허준이 조선시대 침술의 최고봉인줄 알았는데, 허임이 조선시대 침술과 뜸의 대가였다.


허임(許任·1570~1647 추정)은 1570년에 전라도 나주 노비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부모의 병 때문에 의원의 집에서 잡일을 하면서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 허임의 부모 묘소와 자식의 묘소가 충남 공주에 있는 것으로 봐서 공주가 허임의 삶의 터전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허임의 아버지(허억봉)가 당시 조정에서 악공을 시험하는 악보를 만드는 데 참여할 정도로 지명도가 높은 악공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근거로 하면 허임의 아버지 대에서 이미 한양에서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허임이 나서 자란 곳이 한양일 수도 있다.)

그의 아버지 억복(億福)은 강원도 양양 출신의 관노로, 피리 솜씨가 뛰어나 그 실력을 인정받아 이후 장악원에서 악공으로 일했다. 어머니는 정승 김귀영 집안의 사비였다.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명성이 퍼져 나중에는 시의(侍醫)로 등용되기도 했다.
허임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의 허준(許浚·1539~1615)도 인정한 침술의 대가였다.
1612년에는 명의로 소문난 허준과 함께 의관록에 기록됐다.
뛰어난 침술로 소문이 난 허임은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하여 정3품 당상관으로 파격 승진한다.
광해군이 보위에 오르면서 영평현령, 양주목사, 남양부사를 역임했다.


광해군 15년 (1623년) 허임이 50대 중반 정도 되던 해 의관들이 임금의 하교를 외부로 누설시켰다는 이유로 감봉을 당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실록에서는 허임의 이름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허임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지 않은 지 20년 후인 1644년, 허임이 70대에 이르러 조선시대 최고의 침구서적인 침구경험방이 간행된다.

침구경험방의 발문을 쓴 당시 춘추관이면서 내의원 제조를 맡고 있던 이경석은 당대의 문장가이다.
그는 발문에서 허임의 침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태의 허임은 평소에 신의 의술로 일컬어졌고 평생 동안 치료한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 경우도 많아 일세에 명성을 떨쳤으며 침의들에게서는 으뜸으로
추앙되었다.
지금 이 경험방의 글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손으로 시험해 본 것이다.
분명치 않은 것은 분명하게 하고, 번거로운 것은 요약하고, 틀린 것은 바로잡았다.
질병의 원인과 치료의 중요한 묘방이 한번 책을 열면 곧바로 눈앞에 선명하니 간략하면서도
쉽고 요약되었으면서도 상세하다고 할 수 있다.”

허임은 그의 책 서문에서 “이제는 늙어서 그나마 올바른 법이 전해지지 못할까 근심하고 있다.
”며 노침구의원(老鍼灸醫員)의 심경을 피력하고, “감히 스스로를 옛사람의 저술에 견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동안 고심한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읽는 사람들이 궁리해서 구급활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라며 자신의 임상경험을 후대 사람들이 널리 활용하기를 기대하였다.

이러한 그의 기대는 그 후 침구경험방이 판본으로 여러 차례 간행되고, 전국각지에서 필사본으로도
수없이 만들어졌고, 언해본까지 나올 정도로 백성들의 생활의술로 자리를 잡았다. 그의 뜻은 이루지고 있었다.

허임이 세상을 떠난 반세기가 지난 1700년 전후 조선에 유학 왔던 일본 오오사카 출신 의사 산천순암
(山川淳菴)은 일본으로 돌아갈 때 침구경험방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1725년 일본판 침구경험방을 펴내면서 그는 서문에서 “조선의 침가(鍼家)들이 하나같이 다 허임의 경험방을 배우고 이용하여 좋은 효과를 거두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담을 전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유독 조선을 침자(鍼刺)에 있어서는 최고라고 부른다. 평소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다는 말이 정말 꾸며낸 말이 아니었다.”

또한 1800년대 말에는 청나라에서 '침구집성'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그 내용이 허임의 침구경험방을 거의 표절했을 정도다. 동양 삼국에서 모두 인정받는 침술이었던 것이다.

허임의 침구경험방은 허준의 동의보감과 함께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원래 허임의 9대조는 세종때 좌의정을 지낸 문경공 허조였다.

허조의 아들 허후(허임의 8대조인 허눌의 친형)는 수양대군의 정권장악에 반대하다 귀양을 가서 교형을 당하고,
그 허후의 아들인 허조(허임의 7대조인 허담의 친형,허후가 자식이 없어 허눌의 큰아들을 양자로 들였음)는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기도하다 발각되어 자결하였고, 이에 연루되어 허조의 두 아들도 교형을 당하였다.

그 일이 있던 세조 2년(1456년) 당시 허조의 손자 허충(許忠)은 어린 아이였으므로 괴산으로 유배되었다가 관노가 되는 것으로 하였고, 그 당시 허임의 조상도 장손 허충의 집안과 함께 괴산으로 유배되어 관노로 부처된 것이다.


선조실록 37년 9월 23일(1604년 음력 9월 23일) 기사를 보면, 왕의 편두통 증세가 위증한데도 허준은 침을 놓지 못하고 침의 허임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왕이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묻자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차례 침을 맞으시는 것이 미안한 듯하기는 합니다마는, 침의(針醫)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熱氣)를 해소시킨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小臣)은 침 놓는 법을 알지 못하오며(而小臣則不知針法)』,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渠輩所言 如此故啓之矣). 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經脈)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 합니다(此言似有理)"라고 되어있다고 한다.


명불허전은

침을 든 조선 최고의 한의사 허임(김남길)과 메스를 든 현대 의학 신봉자 외과의 연경(김아중)이 400년을 뛰어넘어 펼치는 조선 왕복 메디활극이다.


명불허전에서 김남길(허임)과 김아중(최연경)의 연기력과 캐미에 매주 드라마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명불허전 드라마 6회에서 허임은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어머니한테 언문을 배웠다고 나온다. 세조가 양반집안을 천민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대대손손 한문을 배우게 했다 보다.


신비한 침통을 본적이 있는 할아버지의 대사를 통해, 허준(엄효섭)이 과거에 조선에서 대한민국에 왔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조선왕복 메디 활극이 제목이니 만큼 앞으로도 조선시대로 다시 가는 계기가 계속 나올 것이라 생각된다.

매주 토요일, 일요일이 기다려진다. 다시 돌려봐도 너무 재미있다.




허준 (1539 ~ 1615) 1546년 생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하며, 경기도 양천에서 출생했다.

동의보감 저술

허준이 주치의로서 모셨던 선조는 그를 가리켜 "제서(諸書)에 널리 통달하여 약을 쓰는 데에 노련하다." 라고 평가한 바 있다.

양천 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허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그는 일찍이 글을 익혔으며, 다방면의 학문에 통달(通達)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유가(儒家),도가(道家),불가(佛家)를 어우르는 동양의 종합적 사상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허준의 학문적 영역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훗날 동의보감의 집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드라마에 나온 유의태는 허준보다 100년 이상 늦은 시기에 활동했으며 허준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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